Managing Expert
박요셉
Joseph Park, J.D.
대표, 변호사
Associated Service

현대의 소송법체계는 기본적으로 당사자주의, 즉 소송의 당사자(민사소송의 경우 원·피고, 형사소송의 경우 검사와 피고인)가 소송의 목적(소송물)에 관하여 결정할 수 있다는 사고에 입각하여 있습니다. 당사자주의는 다시 변론주의, 즉 소송의 당사자가 직접 증거를 채집하여 법원에 제출해야 한다는 원칙을 내포하고 있으며(형사소송의 경우 이론적으로 변론주의가 아닌 직권주의가 지배한다고는 하나, 실제 피고인은 변론주의에 준하는 입증책임을 지며, 무죄추정원칙 역시 체감되지 않는다고 보시는 게 편합니다), 이를 구체화하기 위하여 다시 이른바 무기평등(武器平等)의 원칙이 적용됩니다.
물론 헌법이나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등에서 위와 같은 개념들을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지는 아니합니다. 그러나 민사소송법은 위와 같은 전제하에 입증책임의 분배 및 자백에 관한 여러 조문들을 전개하고 있으며, 형사소송법 역시 위와 같은 개념체계에 입각한 규정을 여럿 거느리고 있습니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절차는 역시 증거개시(證據開示)일 것입니다. 우리 형사소송법은 2008. 개정을 통하여 증거개시에 관한 규정을 명시하였는데, 이를 거꾸로 말하면 헌정 이후 반백년 이상의 세월동안 피고인은 형사재판의 당사자이면서도 수사기관 및 법원이 가지고 있는 무기를 제대로 보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하였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실제로 증거개시제도의 신설 이전에는 피고인이 아니라 “변호인”, 즉 변호사만이 증거에 관한 열람 및 등사(복사)가 가능하였고, 그 또한 허가여부가 검찰 또는 법관에게 맡겨져 있었기 때문에, 변호사를 변호인으로 선임하지 않은 피고인들은 자신이 어떤 증거에 의하여 어떤 혐의로 기소된 것인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공판정에 서는 경우도 잦았습니다1. 현재는 검사가 기소를 하더라도 공소장만을 법원에 제출하고(公訴狀一本主義), 증거기록은 증거조사가 완료되는 시점에서 법원에 제출하도록 되어 있어서, 피고인으로서는 증거조사과정에서 재판부보다 미리 증거자료를 열람 및 복사한 뒤, 증거능력이 없는 증거에 관하여 이의를 제기하거나, 그 입증력을 탄핵(彈劾)할 수 있는 반대증거를 제출하여 놓는 등 실질적인 방어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형사소송법 제266조의3 외).
증거개시제도는 우리 법조문에 새겨진지 오래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실무를 진행하다 보면 증거능력이 없어서 법원에 현출되어서는 아니 되는 증거가 “보지 마세요”라는 딱지만 머리에 붙힌 채 버젓이 공판기록에 들어가 있고, 증거조사를 마치기 전에도 재판부가 대부분의 중요 증거의 취지를 인지하고 있는 등(다만, 증거조사 완료 전까지 법원이 깜깜이로 심리를 하라는 것 역시 증인신문 등의 절차를 생각하면 상당히 부당한 것은 맞습니다. 이러한 부당함은 피고인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이론적인 개념과 이념이 실무에 온전히 생착(生着)된 것이라고도 평가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더라도, 최소한 피고인과 변호인이 증거조사과정에서 의견과 이의를 제기할 수 있고, 검사와 법관이 가지고 있는 증거, 즉 동일한 무기를 쥘 수 있다는 것은 방어권 행사에 있어서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의 의미가 있습니다. 형사절차를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분은 쉽게 납득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만, 형사절차에서 검사님은 唯一神이요, 판사님은 근엄하고 무섭지만 그래도 의지할 수 있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입니다. 피고인이 이 분들과 대등한 입장에서 사건의 처리를 논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고도로 민주주의가 발달하지 않고서야 꿈도 꾸기 어려운 일입니다(우리나라는 이러한 인권보호의 면에서는 세계 초일류 선진국이며, 일본 등 여러 선진국 변호사들이 우리나라의 발전된 인권보호체계를 부러워하며 배우려는 일이 많습니다).
아무튼 이상의 이야기는 검사와 동등한 자격과 지위를 가진 채 링(鬪技場)에 입장하는 변호사와(피고인이 변호인 없이 위와 같은 제도를 이용하는 것도 가능하기는 합니다), 이들을 주의 깊게 지켜보는 공정한 심판(referee)인 재판부가 존재하는 공판정에서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수사과정에서는 어떠한가. 사건이 기소에 이르렀다면 무죄를 받는 것은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합리적일 정도로 우리 형사재판은 기울어진 운동장입니다(형사소추의 효율성과 실체적 진실의 발견을 고려할 때 이러한 관행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수사과정에서는 말이 통하지 않으니 나중에 재판을 통해 진실을 밝히겠다.”는 사고방식은 실무에서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무기평등의 원칙 또한 수사과정에서 그 의미와 역할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형사소송법에서는 수사과정에서의 증거개시절차 또는 이에 준하는 무기평등원칙의 구현제도를 전혀 구비해 놓고 있지 않습니다. Not at all! 따라서 변호인은 형사소송법이 아니라, 일반법인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에 따라서 “정보공개포털” 사이트에 들어가서 정보공개신청서를 작성 및 제출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정보공개제도는 세계적인 수준의 선진성을 갖추고 있으며 그 처리 역시 공정하고 투명하게 이루어지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형사소송법이 공판절차에서는 강력하고 신속한 방어권을 보장하고 있음에 비하여, 정작 실무적 중요성이 훨씬 더 큰 수사과정에서는 이러한 절차를 전혀 보장하고 있지 않아 공공기관에 관한 일반적 정보공개제도를 이용해야 한다는 것은, 상당히 큰 문제점 내지 입법의 흠결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수사단계에서는 증거를 조작 – 특히 증거 중 가장 중요한 진술증거에 관하여 진술자에게 수를 쓴다거나 하는 위험이 공판에서보다 더 높기는 합니다만, 사실 이러한 문제는 불구속사건에서의 공판과정에서도 비슷하게 존재하기는 합니다. 물론 공판정에서는 위증의 벌을 경고하고 선서하기는 하지만, 그렇다 해서 위증죄의 기소와 처벌이 활발한 것도 아니기도 합니다.)
더욱이 문제가 되는 것은 정보공개법 제9조 제6호에 의한 “개인정보”입니다. 즉, 수사기관의 정보공개 실무는, 기본적으로 “피의자 본인이 진술하거나 제출한 내용”만을 공개하여 주되, “상대방(고소인, 피해자)이나 제3자(참고인)이 진술하거나 제출한 내용”에 대하여서는 이를 개인정보를 이유로 이를 일절 공개하여 주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는 기억을 하거나 메모를 하여 충분히 알 수 있기에 정보공개에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진술과 제출한 자료입니다. 이러한 진술과 자료는 어차피 종국적으로 수사기록에 편철되어 법원에 제출되며, 피고인 및 변호인은 증거개시제도를 통하여 이러한 수사기록을 다시 볼 수 있는 운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수사기관은 상대방의 진술 및 제출자료의 공개를 요구하면 위와 같은 이유(또는 동조 제4호의 수사보안을 이유로) 이를 알려 주지 않습니다.
서울행정법원 2022. 4. 22. 선고 2021구합76552 판결(확정)은 그다지 유명한 판례가 아니지만, 이러한 쟁점에 있어서는 선도적 판례(Leading case)라고 생각합니다. 해당 사건에서 피의자는 검찰의 정보공개거부처분에 관하여 행정소송을 제기하여 결국 승소하였습니다(2020. 수사하던 형사사건에 관한 소송이 2022.에 선고되었으니, 실익은 없었을 것입니다. 원래 행정소송들이 더러 그렇습니다). 이후 서울행정법원 2023. 1. 19. 선고 2021구합79742 판결(확정) 등 다수의 판결들이 유사한 결론을 도출하였습니다. 제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아직까지 대법원에서 동일한 쟁점을 심리한 기록은 없습니다. 만약에 대법원에 올라가더라도 아마 비슷한 결론이 날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게 되면 완전히 선도적 판례가 되고, 법조계는 물론 일반 언론에서도 이를 여럿 보도할 테니, 수사기관으로서도 위험을 감내하며 구태여 상고를 할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BizWin에서는 위와 같은 판례들을 인용하여 변호사 명의의 의견서를 함께 첨부하면서, 상대방에 관한 정보의 공개를 함께 청구하는 편입니다. 물론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수사기관, 특히 일선 경찰서에서는 위와 같은 법리를 전혀 모르시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특별히 상대방 측의 진술내용 등을 알 필요가 없는 사건이나, 작은 사건이라면, 이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萬事가 다 人事이니, 유의미하지 않은 정보를 캐내기 위하여 수사관을 괴롭히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합리성을 잃은 의사결정입니다). 이 경우 일부 수사기관에서는 상대방의 개인정보를 지운 채 신문조서 등을 공개하여 주고, 일부 수사기관에서는 비공개방침을 고수하는데, 경험상 성공률은 半半 정도인 것 같습니다.
일선 수사기관에서 근무하는 대부분의 사법경찰관들은 위와 같은 법리에 관하여 상세히 알지 못합니다. 사실 알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한 법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여 설득하는 것이 변호사의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변호사들조차도 위와 같은 내용을 잘 알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이 있는데, 이는 매우 아쉬운 일입니다. 물론, 근본적인 문제는 수사과정에서 별도의 증거개시제도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더욱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문제의식 자체가 아직까지 공론화 내지 의제화된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형사소송법에서 수사과정에서의 변호인 조사참여권을 비교적 최근에서야 신설하였다는 점을 보더라도, 아직까지도 형사소송법의 눈길은 전문가들이 신사적 규칙에 입각하여 싸우는 링인 공판정에 머물러 있고, 실제로 형사사건의 승패가 결정되는 수사단계에 대하여서는 그다지 엄격한 법치주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초기 경찰의 수사가 가지는 실무적인 중요성을 고려했을 때, 최소한 피의자와 변호인(또는 고소인과 고소대리인)에게도 수사기관과 동일한 무기를 들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은 속히 마련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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